우리의 믿음 하나: 윤회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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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김광섭 시집「겨울날」(창작과비평사刊.1975년) 

일생 동안 계속 이어지던 숨이 멎고 의식이 점점 엷어지다 사라지면 죽음입니다. 연극의 한 막이 끝나 무대와 객석에 조명이 모두 꺼져 눈앞이 암흑인 것처럼, 죽음은  생명의 움직임이 멈춘 어둠이자 정적입니다. 하지만 불교가 얘기하는 삶의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그 고요한 정적은 끝이 아니며, 조용한 변화 속에서 다음의 삶을 준비합니다.

반복하는 삶의 가능성과 변화

죽음을 따라 태어난 지금의 삶은 다시 죽음을 맞고, 또 다른 삶이 그 뒤를 뒤따라올 것입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과 삶이 죽음이라는 막으로 나뉘어 끝없이 이어지는 존재의 변화를 우리는 윤회라 부르지요.  되돌릴 수 없고 거꾸로 흐를 수 없는 시간의 특성상 죽음 너머의 삶의 모습은 오롯이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윤회를 믿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불교의 믿음이라는 큰 주제 아래 믿음의 구체적 내용으로 부처님도 아니고 그의 가르침도 아닌 윤회를 가장 먼저 얘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업과 연기를 통한 삶의 구체적 변화의 모습, 즉 윤회가 불교의  밑그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윤회에 대해 경전에서는 자주 부처님께서 제자의 죽음의 소식을 들으시고, 그 제자가 어디에서 다시 태어나 언제 깨달음을 완성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윤회는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눈을 통해 직접 목격한 구체적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불교의 역사 교리와 수행에 관한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논쟁이 스님들 사이에 있었지만, 윤회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삶의 진실임을 부정했던 고승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윤회는 이처럼 깨달은 눈에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혜의 눈이 밝지 못한 우리에게 윤회는 직접 알 수 없는 것으로, 존재의 신비이며 믿음의 대상입니다. 스스로의 눈으로 직접 알 수 없어 윤회는 믿음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것은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닐 테지요. 돌고도는 계절 속에 나무의 잎이 나고 지고를 반복하는 것처럼, 또는 비가 산천초목을 적셔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구름이 되어 비로 변하듯, 자연의 변화 속에서 존재의 끝없는 흐름을 목격합니다. 자연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 인간의 삶도 윤회라 불리는 변화의 흐름과 함께라는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입니다.

불교의 큰 밑그림

윤회가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의 밑그림이 말하는 이유는 윤회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고통이 부처님의 출가와 수행 그리고 깨달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업과 연기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윤회의 터전 가운데 미래의 부처가 될 한 인간이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태어났지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삶의 모습을 목격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왕궁을 떠나 출가자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7여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고통 없는 이상적 삶의 모습을 이루고, 그 후 죽을 때까지 혼신을 다해 진전한 행복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세상에 전합니다.

윤회가 불교의 밑그림이라 말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윤회를 부정할 경우 청정한 삶의 실현을 강조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전부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생이 한 번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밤하늘의 불꽃놀이 같은 것이라면 이렇게 살다가도 저렇게 살다가도 큰 차이가 없을 테지요. 이것을 거칠게 표현하면 부모를 죽인 살인자의 삶과 성인의 삶이 죽음이라는 허무를 맞아 종국에 모두 의미를 잃는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죽음이 궁극의 끝이라면 세상을 선하게 열심히 살려는 그리고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 모두 의미를 잃어버리니까요.

우주적 정의

불교적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의 의미를 바치는 기둥임과 동시에 그것은 또한 평등한 우주적 정의의 표현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내 삶의 업들이 훗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면, 우리는 결코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살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불교적 윤회관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고 공정한 우주적 정의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편 어떤 종교에서는 삶의 정의를 바로하고 인간의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사후를 얘기합니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로 영원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이 세계관도 공정한 삶의 정의를 얘기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평한 기회의 희망

나 없음과 변화를 강조하는 불교의 윤회 속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하게 지은 만큼의 보상을 받고, 지은 만큼의 벌을 받는다 얘기합니다. 비록 오늘의 삶에 조금 실수가 있더라도 언제든 기회는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흥미롭게도 불교에서 윤회의 삶은 고통이지만 또한 동시에 희망이 되고 평등한 기회가 되는 이유입니다.

불교의 윤회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그래서 이것을 믿는 우리 불자는 오늘의 이 삶을 함부로 살 수 없고, 자신의 삶의 고통에 대해 다른 이를 탓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인연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지요.

글의 처음에 소개한 시가 말하듯, 윤회 속의 인연이라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하늘의 무수한 별 가운데 하나의 별을 만나는 것일 테지요. 비록 새벽이 찾아와 별은 사라지고, 죽음이 찾아와 내가 사라지지만 자비의 삶 속에 너와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분명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 글을 다 읽은 당신이 윤회를 믿으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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