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금강경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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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이 경전을 찾아 읽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다양하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그 안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조언들을 찾고자 해서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이런저런 경전을 집어들지만, 우리가 원하는 답과 삶의 위로는 쉬이 찾아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이 내 삶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경전은 혹은 금강경은 과연 우리 삶에 어떤 구체적인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공이라는 하나의 약으로 처방하기에 지금 우리가 겪고 부딪치는 삶의 문제들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난 달에 소개한 “맛 금경경”에서 잘 소화된 좋은 음식은 삶의 치유와 위로가 되고, 경전도 음식같은 맛과 영양을 가진다 비유로 설명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금강경이 설명하는 공의 가르침은 쉬이 잡히지 않고, 그것은 소화하기 쉽지않은 음식같기도 합니다. 움켜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과 공기처럼 공이라는 개념과 원리는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기 때문이겠죠. 그런 이유로 공사상을 그려보이는 금강경의 맛을 흰 백자에 담긴 공기의 맛 혹은 물의 맛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유를 지난 시간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금강경이 주는 삶의 주는 치료와 위안은 공기와 물이 그 없는 맛으로 없는 생명을 살리는 이치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금강경이 삶에 주는 위로의 가능성을 처음 마주한 곳은 박경리씨가 소설 토지를 읽을 때였습니다. 조선말기 부터 해방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긴 이야기속에는 주인공 서희가 만주에 살면서 때때로 절을 찾아가 금강경을 읽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삼촌인 조준구에게 가족의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서희는 하동 평사리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를 하지요. 서희는 그곳에서 할머니 윤씨 부인이 남긴 금괴를 팔아 목재 장사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벌어 들입니다. 경상남도 하동 평사리의 부잣집 양반의 규수로 태어났지만 삶이 온통 질곡과 상처 뿐이었던 서희는 복수의 집념 덩어리가 되고, 목적을 위해 그녀는 관습과 통념을 버리고 장사치가 되고 노비인 길상이와 결혼을 감행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가운데서도 윤씨 부인인 자신의 할머니가 그랬듯 서희는 장사를 통해 모은 돈으로 만주에서도 절의 불사를 돕고 큰 시주를 계속 이어갑니다. 그리고 때때로 절을 찾아가 금강경을 읽습니다. 한많은 삶에 금강경을 읽는 것은 서희에게 어떤 의미와 위로였을까요?

그때 세존(世尊)께서 식사 때[食時]가 되자 가사(袈裟)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사위성으로 들어가셨다. 그 성 안에서 탁발하시면서 차례로 빌어 빌기를 마치고는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진지를 잡수시고 나서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위와같이 금강경의 시작에는 부처의 먹고사는 평범한 일상이 차분히 드러납니다. 빼지도 더하지도 않은, 부처의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이 담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인간의 특별함과 권위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해서 너무도 평범하게 그려진 부처의 삶이 시시해 보일지도 모를일 입니다. 밥먹고 사는 일은 부처가 아니어도 누구나 해야하는 일이고, 밥 한 숟가락을 뜨기 위해 사람이 앉고 서고 걸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 하기 때문이죠.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깨달음을 얻은 인간의 모습치고는 너무도 평범합니다. 이처럼 금강경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인간에 대한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기대를 차분히 거절합니다. 

흥미롭게도 금강경의 설명서인 주해를 쓰셨던 많은 큰스님들은 한결같이 저 평범한 부처의 삶 속에서 담담히 빛나는 그의 위대함을 지적하십니다. 공양 때가 되어 옷을 챙겨 입고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마을로 걸어 들어가 걸식을 하고, 다시 처소로 돌아와 밥을 먹고 발을 씻고 앉는 한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속에 어떤 위대함과 특별함, 혹은 어떤 삶의 구체적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일까요?

공양하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에

자리펴고 앉으심은 누구와 함께 하심인가

아래의 긴 문장을 아는가, 모르는가.

보고 보아라. 평지에 파도가 일어나도다.  -야부스님-

부처님의 마음과 삶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백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나’를 잊고 또는 주장하지 않으며, 있는 듯 없는 듯 공간의 한켠에 무심히 놓여 ‘있는’ 백자. 색과 모양의 평범함으로 단번에 그 아름다움이 눈에 잡히질 않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을 쉬고 무심히 바라보는 백자에서 도공이 무심으로 만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날이 찾아옵니다. 금강경의 시작이 그리는 부처님의 담담한 일상은 그 백자같은 마음에 가깝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을 해봅니다. 나아가 표현 불가능한 진리가 백자처럼 빚어진 언어, 그것이 금강경의 언어가 아닐까 가늠해 봅니다. 그렇다면 ‘나’를 잊고 놓여있는 백자처럼, 부처의 평범한 일상의 묘사는 “내”가 없이 혹은 나를 주장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위대함에 대한 가르침은 아닐까 합니다. 

이때 장로(長老) 수보리(須菩提)가 대중 속에 있다가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希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보살들을 잘 염려 보호해[護念] 주시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善付囑] 주십니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한 분으로, 해공제일 즉 우리 삶과 세상의 공한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부처님의 제자라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발을 씻고 단정히 자리에 앉으신 후 존자는 불현듯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존경의 예를 표합니다. 그리고 부처의 위대함을 발견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희유”하다 말로 표현하며, “여래는 보살들을 잘 염려 보호해 주시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 주신다” 찬탄을 합니다. 왜 수보리는 어찌보면 뜬금없다 싶게 갑자기 일어나 이런 말을 부처님께 건네는 것일까요?

여래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거늘

수보리가 문득 찬탄하였으니

눈을 갖춘 훌륭한 무리들은

시험삼아 잘 착안해 볼지어다. -야부스님-

앞서 잠시 설명드린 것처럼 해공제일로 삶의 진실과 깊이를 볼 줄 아는 수보리 존자는 부처의 평온한 삶에서 은은히 빛나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본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의 청정함과 번뇌없는 삶의 모습을 넘어 혹 누군가 부처가 아주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그에게 수보리의 갑작스런 행동은 좀 이상하게 보여질테죠. 특별함이 없기에 부처의 고요한 삶 속에 깨달았다는 권위를 찾을 수 없고, 내가 특별하다는 마음의 부산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청정한 삶 가운데는 “내”가 없기에 번잡스런 감정의 물결이 마음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결이 일지 않는 고요한 호수에 저 하늘이 담기듯, 나를 잃은 부처의 마음이 세상과 그곳을 살아가는 중생, 사람들의 삶을 비춥니다. 부처의 맑은 마음 가운데 비추어진 중생들의 삶을 부처는 외면할 수 없을테지요. 결국 항상 보살들, 즉 불법에 입문한 우리 불자들을 항상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부처의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이며, 당신의 담담한 삶에 마지막 남은 열정일 것입니다.  이렇게 금강경은 딱딱한 공의 논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부처의 열정, 중생들을 향한 자비의 삶의 모습을 수보리를 통해 보여줍니다. 하지만 부처는 삶의 열정에 고뇌하거나  함몰되지 않으며, 그저 담담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연에 충실합니다.

담넘어 뿔을 보면 문득 소인줄 알고

선넘어 연기를 보면 문득 불인줄 알도다.

홀로 앉아 높고 높음이여! 천상천하거늘

남북동서에서 거북과 기와로 점을 치도다. -야부스님-

그렇게 부처님의 삶의 모습에 감동한  수보리는 부처님께 바로 질문을 이어갑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의 마음을 내고는 어떻게 머물러야 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됩니까?”

수보리 존자가 지칭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고, 지금 이 글을 읽는 혹은 금강경을 읽는 불자, 바로 당신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믿게된 불자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즉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마음이 우리 행동과 삶의 모습을 결정하는 중심이 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고, 그래서 존자가 묻는 마음을 내고, 어떻게 머물고, 항복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인간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당신같이 청정하고 자비롭게 살 수있습니까 라는 질문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금강경이 불교의 공관을 가르치는 경이라 많이들 알고 있지만, 수보리 존자의 방금 질문을 통해서 저는 금강경이 단순한 지식이 아닌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올바른 삶의 방식은 정녕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삶의 치유와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깨달음 인간의 삶의 평범함과 그 평범함 속에서 빛나는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때문은 아닌지 생각하며, 화려함과 현란함으로 가득한 이 시대 금강경은 삶의 기본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금강경에 보여주는 부처의 일상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삶의 착실히 조용히 묵묵히 사람들에 대한 찬가는 아닐까 조심히 생각해 봅니다.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고

그대는 슬퍼도 나는 슬피지 않도다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고

제비는 옛집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도다

가을달과 봄꽃의 무한한 뜻은

그 속에서 다만 스스로 알 뿐이로다.  – 야부스님-

다음에 계속

아무나(我无那)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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