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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쓴 반야심경

교회의 주기도문처럼 반야심경은 새로 절의 문지방에 발을 들인 사람이 가장 먼저 외우고자 노력하는 경전일 것입니다. 새벽, 사시, 저녁예불, 그리고 거의 모든 절집의 의식에서 빠지지 않고 독송을 하다 보니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경전이기도 하고요. 260자의 짧은 한문으로 이루어진 반야심경般若心經 은 서유기의 삼장 법사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중국 당나라 현장 스님에 의해 7세기 중엽에 산스크리트 원문이 번역됐다합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뿐만이 아니라 티베트, 베트남 등 여러 대승불교권의 사찰과 사원에서 종파를 초월해 사랑받는 경전입니다. 그리 오래도록 많은 곳에서 이 경전이 우리 불자들의 삶 가까이 자리한 이유는 아마도 짧은 문장으로 스케치처럼 묘사한 나와 세상의 바탕이 놀랍도록 정확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시듯, 반야심경은 불교의 공사상을 가르치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이 공을 그냥 비어 없는 것이 아닌, “텅 빈 충만”이라는 하시며 사람과 사물의 바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연기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이란 없다라는 존재의 부정이 아니며, 관계가 만들어 보이는 삶의 흐름이라 달리 표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큰스님과 학자들이 쓴 많은 해설서들 속에 지식으로 우리가 알 야야 할 “공”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알려진 지금, 논리와 이론으로 설명하는 반여심경의 해설은 잠시 미루어 보겠습니다. 대신, 진리를 꿰뚫은 언어가 실제 우리 삶에 어떤 힘을 나타내는지 반야심경에 얽힌 한 이야기를 통해 전해 보겠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되어 비파를 불어 생계를 유지하는 한 젊은이가 일본의 어느 시골 마을 고즈넉한 절에 한 스님과 살았습니다. 눈먼 청년이 튕기는 비파 가락은 포악한 귀신도 지나가다 듣고 눈물을 흘릴 만큼 구성지고 구슬펐습니다. 청년의 비파연주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지만, 그의 삶은 한결같이 가난했지요. 그러던 깊은 밤 어느 날, 거친 목소리의 사무라이가 절의 구석진 방에 머무는 청년을 찾아옵니다. 칼을 차고 문 앞에 서서 사무라이는 청년에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연주를 부탁합니다. 칠흑 같은 밤길을 헤치고 사무라이를 따라가, 청년은 비파를 연주한 후 자신의 처소로 돌아옵니다. 다음날 밤에도, 또 그다음 날 밤에도 연이어 계속 사무라이는 청년을 찾아와 연주를 청합니다.

그러던 중, 밤마다 방에 청년이 없는 것을 알고 기이하게 생각한 스님은 절의 하인을 시켜 청년이 밤에 어디를 가는지 알아보라 지시를 합니다. 미행을 마치고 돌아온 하인은 청년이 아무도 없는 공동묘지에서 미친 듯 비파를 불고 새벽녘이 되어 절로 돌아온다고 스님께 전합니다. 단박에 이것이 귀신의 농간인 줄을 안 스님은 청년을 불러 그의 몸 구석구석에 반야심경을 붓으로 쓰십니다. 그리고 나서 스님은 청년에게 처소로 돌아가 옷을 벗은 체 움직이지 말고 고요히 방에 앉아 밤을 보내라 지시를 합니다. 

사무라이로 가장한 귀신은 그 날 밤에도 어김없이 청년의 방을 찾아오지만, 기이하게도 방에 앉아 있는 청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스님이 실수로 빼놓고 반야심경을 쓰지 않은 청년의 귀 만이 보입니다. 귀신은 하는 수 없이 보이는 청년의 귀 만을 잘라서 가지고 돌아갑니다. 이렇게 스님과 반야심경의 도움으로 청년은 귀신의 괴롭힘에 벗어났다 하고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눈먼 청년의 몸에 새겨진 반야심경은 어떻게 귀신의 눈을 속여 청년의 몸을 감추었을까요?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 바라밀을 행하시는 때에 “나”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들이  모두 공함을 보시고 고통을 건너셨다는 한 수행자의 깨달음으로 그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보살은 부처님의 제자 중 한 사람, 사리자(사리불) 존자의 이름을 부르며 법문을 시작하고 그것이 경의 끝까지 이어지지요. 흥미롭게도 반야심경은 여타의 많은 경전과는 달리 부처님이 아닌,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이 부처님의 제자에게 대신 가르침을 주고 있죠. 이처럼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가르치는 경전이기 전에, 한 인간의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이를 통한 고통의 극복, 마지막으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려는 아름다운 사람의 관계가 그 이야기의 큰 줄거리입니다.

반야 바라밀은 많이들 아시듯 지혜의 완성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의 한문 번역어입니다.  깊은 지혜는 수행, 특히 관수행(비파사나)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여러 경전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고요한 마음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그 집중을 통해 잡다한 번뇌가 사라지면, 수행자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힘을 얻되 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지요. 이 고요함 속에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는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오온의 안과 밖 어디에서도 나라고 여길 무언가를 도무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나를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수행자는 “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라는 생각으로 나타나는 집착과 가지가지 욕망을 버리고 결국 삶의 모든 고통을 극복한다고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얘기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관세음보살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려 사리불 존자의 이름을 부릅니다. 혼자 행복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다른 이와 함께 나누려는 것이 자비의 삶이기 때문이겠지요. 삼매 속에서 바라본 모든 것은 그저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연기의 흐름, 공일 뿐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공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보니 부처님이 보이신 여러 가지 가르침의 말들도 한낱 껍데기일 뿐이지요. 연기의 다른 말인 공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말고 언어를 너머 있기에, 부처님의 하신 모든 가르침의 언어들이 부정되어 돌아옵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는 수행을 통한 마음의 집중과 진실한 통찰로써 모든 어리석음, 집착, 그리고 삶의 두려움을 극복했다 하시며, 반야 바라밀, 지혜의 완성은 우리 삶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 되지 지식이기에 허망하지 않다 가르치십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신비한 힘을 가진 주문이며, 어두움을 밝히는 주문이겠지요. 마지막으로 반야심경은 말의 저 너에 있는 공한 삶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닌, 진언으로 그리며 그 짧지만 깊은 가르침을 마무리합니다.

다시 앞서 소개한 이야기로 돌아가 그것을 다시 살펴보면, 우리는 그 눈 먼 청년의 이야기 속에서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보이는 유사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눈먼 청년이 머물렀던 절의 스님은 자신이 배운 가르침과 수행의 경험을 토대로 외부적 혹은 내부적 원인에 의해 현실과 환영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청년을 반야심경을 통해 구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지혜와 고의 해결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이지요.

음악가인 청년이 눈이 멀었다는 설정은 보통 사람들의 무명과 어리석음에 대한 우회적 표현일 것입니다. 눈이 먼 것 처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 때, 인간은 자주 쉽게 욕망에 노예가 되고, 욕망은 집착으로 이어집니다. 재능이 있으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청년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가 얼마나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열망 했을지 짐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토록 이루고자 하는 꿈이 집착될 때 인간은 스스로 만든 환상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로 둔갑한 귀신과 그가 모신다는 주군은, 바로 눈먼 청년 스스로의 욕심과 집착이 만들어낸 환상일테지요.

스스로 만든 환영에 홀려 밤마다 묘지에 나가 비파를 연주하는 청년은 그 욕망과 광기가 삶을 파멸하기 직전, 스님의 도움과 반야심경의 힘에 의해 자신이 처한 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청년이 제정신이 아님을 아신 스님은 옷을 벗겨 청년의 몸 위에 반야심경을 씁니다. 그리고 청년에게 방으로 돌아가 움직이지 말고 고요히 앉아 밤을 지내라 지시를 하시죠. 이것은 다시 말하면 고요히 마음을 집중하고 반야심경이 말하는 삶의 공한 모습, 연기의 모습을 바라보라는 가르침이지요. 청년의 몸을 귀신으로부터 감추었다는 것은 진리를 담은 말, 불법의 가르침은 그 자체가 주문처럼 신비로운 힘을 가진다는 말 일 수도 있지만, 고요히 앉아서 얻은 청년의 스스로 깨달음이 그의 삶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에서 스님은 청년의 귀에 반야심경을 빠트리고 쓰지 않는 실수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사무라이로 둡갑한 귀신은 청년의 귀를 잘라서 돌아갑니다. 누구도 다른 이의 삶을 완벽하게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의 우회적 표현일까요? 아니면 어리석음이 가져온 삶의 실수는 흔적을 남긴다는 교훈일까요? 남루한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  삶의 꿈에 대한 열정이 집착으로 변해 밤마다 잠 못드는 당신을 위해 지금 반야심경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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