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관세음보살

무더운 여름 중생의 아픔을 돌보시느라 여전히 바쁘실테데, 잘 지내시는지요?

머리깍고 절에 온지도 한참이네요.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여 아픈이의 마음을 살피신다는 그 이름 관세음보살. 그런데 아직도 사시 공양 예불을 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일이 쑥스럽고 서투릅니다. 오랜 시간 불러 본지라 분명 낯선 이름은 아닐텐데, 힘주어 부르는 당신 이름의 뒷소리가 작아집니다.

관세음보살, 당신의 이름이 아직 어색한 것은 출가 하여 사는 고통이 견딜만 하여 슬픔이 절절하지 않아서 일까요? 아니면 부모형제 모질게 버리고 떠나서 혼자 사니까 어떤 간절함이 없어서 일까요?

당신은 천개의 눈과 손이 있다지요. 그 많은 눈 하나 하나가 제각기 세상을 바라보며, 그 많은 손 하나 하나는 그 눈에 비친 중생의 어려움을 찾아가 돕는다 하고요.

어쩌면 당신의 그 기이한 눈과 손은 세상사 복잡한 관계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며, 삶 전체를 보고자 하는 지혜를 의미할테지요. 한쪽 만으로 바라보는 우리 삶과 세상, 그러면 항상 그 좁은 시선으로 많은 문제를 만들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아마도 당신의 천개의 눈은 손을 가졌나 봅니다.

진정한 자비란 그저 ‘불쌍하다’ 여기는 값싼 동정이 아니지요. 단순함을 넘어 깊은 통찰로 삶의 복잡한 관계, 혹은 연기의 그물을 보는 일. 자비는 깊은 통찰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따뜻하면서 시원한 마음일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가 보는 삶과 세상은 동네 놀이터 소꿉노는 어린아이가 아이들과 놀다가 토라져서 엄마를 부르며 달려가는 아이같이 단순합니다. 싫고 좋고를 넘어 사는 일. 타인의 삶을 제 멋대로 재단하지 않는일. 그 일이 왜 그리 어려울까요? 내 생각을 말하고 내세우기 보다 들리는 얘기에 귀를 귀울여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 그 일이 왜 그리 어려울까요?

천개는 아니더라도 조금 넓게 세상을 바라볼 눈 하나 더, 그리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손 하나 더 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당신이 어색하고 그리운 날이었습니다. 목놓아 당신을 부르면 나도 당신처럼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을까 했으나,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는 제 목소리는 뭔가에 걸려 그 뒷소리가 작아집니다.

그래도 제 간절한 목소리가 혹시 당신 귀에 닿으면 그 천개의 눈과 손 가운데 쓸만한 거 하나만 내어 주시길 바랍니다.

2017년 7월의 여느날
我无那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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