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미신이다? – Part 2: 폭력의 이유

왜 불교가 미신이라는 현실과는 다른 근거 없는 주장은 계속되었을까요?

참으로 신기한 일은 그렇게 타종교인들이 불교가 미신이라는 넋 나간 주장을 하는 사이에, 똑똑함과 이성으로 무장한 현대의 과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예술가들이 불교가 가진 통찰과 심오함에 깊은 영향을 받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불교가 미신이라는 현실과는 다른 근거 없는 주장은 계속되었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자신의 발아래는 보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모두가 같은 세상을 살면서 인생을 경험하지만, 내 삶은 책 열권으로 써도 부족할 만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때때로 나와 내가 믿는 것이 옳고 특별하다는 생각은 타인과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힘들게 하지요. 끊임없이 자신의 얘기에만 열을 올리는 친구와의 대화가 힘든 이유도 그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종교의 세계에서 이 자기중심성은 모든 종교가 가진 믿음의 같은 성격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성이 도를 넘어 믿음은 분별력을 잃어 종종 맹목과 광신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다시 다른 종교적 믿음에 대한 폄하와 차별로 이어지고요. 하나의 사회가 한 가지의 종교를 믿는 과거에도 맹목과 광신은 큰 문제였지만,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어깨를 맞대고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그것은 더 크고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증없는 하나님 그리고 깨달음

잠시 앞에서 간략히 설명을 얘기했듯이, 모든 종교는 초월적 존재 혹은 사람의 초월적 상태에 대한 경험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적 체험과 경험은 말의 논리와 이성을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경험한 신 혹은 신들을 남에게 직접 보여줄 수 없고, 그 존재를 과학의 실험으로 증명할 수도 없지요. 마찬가지로 부처와 그의 깨달음도 물증을 주머니에서 직접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것같이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불자들이 부처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라 주장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처는 신을 믿지 않고 온전한 착각속에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깨달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반대로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내 판타지 영화속 캐릭터같은 존재이기도 할 것이고요.

첫 번째 이유: 종교의 무합리성 無合理性

결국 이처럼 모든 종교의 믿음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무합리성 (無合理性)의 관점에서 모두 똑같습니다.  과학과 이성의 합리성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의 어떤 종교도 미신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합리성을 믿는 소수의 과학자는 지금 그렇게 모든 종교를 공격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불교가 미신이라면 기독교, 이슬람, 도교 등등 초월적 존재를 얘기하는 모든 세상의 종교는 미신일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창조주 하나님을 얘기하는 기독교 천주교는 미신이 아니고 불교만 미신이라 생각한다면, 그는 혹은 그녀는 자기중심성에 빠져 스스로의 믿음을 맹목과 광신으로 만든 사람들일 것입니다. 설령 기독교의 탄생지인 서구문명이 과학을 발달시켜 인류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부르는 신의 직접적인 증거는 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세계에 사는 인간의 경험이 증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얘기하고 열망하는 것이 모든 종교가 가진 보편적 모습인 면에서, 모든 종교들은 미신이 수도 있고, 미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종교는 비합리일 수도 있고, 무합리일 수도 있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저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는 영원토록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진 종교적 체험과 믿음을 쉽게 미신이라 부르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논쟁은 믿음이 증명할 수 없는 한 끝없는 평행선을 달릴 것입니다. 한 종교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그 가르침이 얼마만큼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삶에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일 것입니다. 만약 어떤 종교가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성에 빠진 맹목과 광신이 되어 다른 종교를 미신이라는 말의 폭력을 행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미신이고 어리석은 믿음일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 무지

불교를 미신이라 오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동시대의 인도인들에게 간곡히 전한 메시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혹 사람들을 현혹시킬지 모를 점 보는 일을 계율을 통해 금지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 당시에 널리 행해지고 있던 희생 의식, 즉 동물을 죽여 삶의 행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비판하시며 생명을 귀히 여기고 올바른 선의 실천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갠지즈강에 몸을 씻으면 몸과 마음의 청정해지고 좋은 곳에 태어난다 믿는 한 수행자에게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청정은 좋은 일을 실천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 오늘날까지 전하는 불교의 많은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모든 생명의 행복을 방해하는 종교적 믿음, 즉 미신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셨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이유: 방편이라는 이름의 자비

마지막으로 불교가 미신이라 오해하는 세 번째 이유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어려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일에 바쁘고 힘든 사람들에게 접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노력, 즉 방편의 사용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불교가 보이는 다양한 방편의 노력은 고통의 현실을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그 출발이며, 다시 말해서 그것은 부처님이 늘 강조하시는 자비의 표현일 것입니다. 절집에서 행해지는 제사, 불공, 그리고 다양한 의식들은 그 자비의 따뜻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지혜의 표현일 것입니다.

방편의 밑바탕에 담긴 자비의 아름다운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절집에서 행해지는 모든 기도와 의식을 미신과 기복이라는 오명을 씌어 비난했습니다. 가족을 위한 사랑 또는 어미의 간절한 마음으로부터 산 속의 고요한 절을 찾아 삶의 행복을 기원하는 일이 왜 그리 기복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강한 어조로 불교를 미신이라 혹은 기복이라 폄하하는 가운데,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제대로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설명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기복이라는 남의 비난을 오래 듣다보니 그것이 사실인 양 생각한 우리 스님과 불자들은 오랫 동안 해오던 절집의 일들을 스스로 나서서 기복을 극복해야한다 비판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전 이 스스로의 자기부정이 안타깝습니다.

 

 Part 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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