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백중 그리고 금강경

2017년 7월 23일 _ 초제

13. 여법수지분

이 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야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이를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라.”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이름을 받아 그것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방금 읽어 드린 금강경의 여법수지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또한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고, 세상에 나가 그 소명을 이어간다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그렇게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다, 때때로 이름만을 남기고 사려 가지요.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름 가운데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소위 인연이란 그 각별한 이름들이 함께 모여 내 삶의 기억 위에 그린 그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쁘게 인연의 특별한 의미를 주고받으며 살다 문득 돌아보면, 사람은 가고 이름만 기억에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매해 여름 백중, 우리 절집은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인연의 온도가 뜨거웠던 이름들을 기억하고자 함께 모입니다.

중생이라 불리며 삶의 온 곳과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생의 소중한 시간을 함께했던 이름들이 그저 어딘가에서 행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백중은 그래서 어리석음과 무지로 생긴 연민과 걱정으로 시작된 불교의 의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단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써 올린 이름들. 운이 좋아 훗날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면 내 이름 또한 해마다 여름이면 이렇게 쓰여 저 단위에 오를 테지요.

죽어서도 누군가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는 일, 그것은 자비의 또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2017년 7월 30일 – 2재

14. 이상적멸분

그때에 수보리가 이 경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 뜻을 잘 알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뜻 깊은 경전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가 지혜의 눈을 뜬 이후로 일찍이 듣지 못하던 바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믿음이 깨끗해지면 실상을 깨달으리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실상이라 말씀하십니다.

일상 가운데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일을 희유하다 표현합니다. 부처님의 입을 통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은 수보리존자는 자신의 삶이 간직한 희유한 인연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금강경의 냉철한 공의 논리는 부처와 중생의 만남 속에서 흥미롭게도 따뜻한 눈물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삶 가운데 희유한 일들은 마법처럼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때문에 가능한 것일 테지요. 우리는 비록 복이 부족해 부처를 만나 그 가르침을 귀로 듣는 인연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지금 부처가 모셔진 절에 와 앉아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일입니다. 이도 지금까지 진리에 혹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살려는 우리의 노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희유한 일의 지속을 위해 항상 부처를 가까이하고, 가르침을 가까이하고, 좋은 가르침을 알고 계신 스님들을 항상 가까이 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금강경 구절처럼, 경전을 통해 부처님에 대한 믿음, 불법에 대한 믿음, 스님들에 대한 믿음을 성취한 불자는 삶의 참모습을 조금씩 깨달아가 결국 아주 먼 내생의 어느날 부처가 될 것입니다. 부처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궁극으로 어느 길을 가야할 지를 아는 것일테지요.

하지만 무지에 의한 집착과 미움으로 우리는 자주 가야할 곳을 잊고 어느 자리를 서성입니다. 살아서도 혹은 죽어서 사람은 집착으로 인한 미련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합니다. 백중은 그렇게 집착과 무지로 죽어서도 다른 곳에 가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도는 영혼을 위한 우리의 기도이자, 자비의 표현입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 마음  속에 각별했던 인연을 불러 함께 제를 올리는 이유는 윤회의 거친 삶 속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자비 때문일 것입니다. 혹 부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운데 이처럼 단을 차려 망자의 이름을 쓰고 그 앞에 음식을 차려 재사를 지내는 일이 농담 같은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백중의 저 밑바닥에 깔린 자비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운이 좋아 충분한 복과 공덕을 쌓는다면 나를 알던 누군가 이름을 기억하여 이처럼 해마다 우리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올려줄 것입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나의 안녕을 빌어주는 일, 분명 희유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제사를 통해 돌아가신 우리의 인연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바른 믿음을 내어 가야 할 길이 어딘가를 분명히 알게 되는 희유함을 성취하기를 간절한 기원하며 오늘도 경건히 조용히 제사를 진행하겠습니다.

2017년 8월 6일 – 3재

15. 지경공덕분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아침나절에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점심나절에도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나절에도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렇게 한량없는 백천만억 겁(劫) 동안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스리지 않는다면, 그 복이 저 보시한 복보다 더 많거늘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에게 일러 주기까지 함이겠느냐.

부처의 가르침에 믿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 즉 우리 불자는 어찌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는 수보리의 질문으로 시작한 금강경은 그 질문의 대답으로 끊임없이 보시의 공덕을 얘기합니다. 보시란 자신이 가진 유형무형의 것을 나누는 것이며, 그 나눔을 행할 때 아무 조건 없이 실천할 것을 금강경은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방금 읽어 드린 금강경 제15 지경 공덕분에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은 듣고 믿음을 낸 불자가 경전을 쓰고 일고 외우고 남에게 일러 줄 때 받는 공덕이 물질을 보시하는 공덕보다 크다 얘기합니다. 불법을 남에게 전하는 법보시의 공덕이 물질의 보시보다 더 큰 공덕이 되는 이유는 진리가 영원 속에서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 잘 알고 있듯, 백중은 출가한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시작되었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 백중 49일 동안의 기도와 일곱 번의 재사 속에는 물질에 대한 보시와 법의 보시가 함께 들어있습니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물질적 보시라면, 우리가 정성스럽게 읽는 의식문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모두에게 진리의 눈을 뜨게 할 법보시일 것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시작된 백중은 사람을 살리는 자비의 소중함에 대한 불법의 표현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키우는 일은 끊임없는 자기의 희생의 보시일 테지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뒤의 누군가가 끊임없는 자기희생과 보시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모성은 우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자비이며, 백중은 그 자비의 표현입니다.

오늘 있을 이 백중 재를 통한 여러분의 기도가 간절한 자비의 표현이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내 주위의 모든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와 수행이 나와 가족, 이웃, 나라, 세계를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든든한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7년 8월 13일 – 4재

16. 능정업장분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 때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이는 전생에 지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업때문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경시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곧 전생의 죄업이 소멸할 것이요, 그래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으을 얻을 것이다.”

삶의 어려움과 고통이 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자주 질문을 합니다. 백중 기도를 맞아 영단에 이름이 올려진 망자들도 살아 있을 당시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다 삶을 마감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고해의 바다인 삶 속에 다행으로 불연이 닿아 우리는 삼보에 귀의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삶을 살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처를 깊이 믿고, 간절히 그 이름을 부르며 끊임없이 보시를 실천하여도, 삶의 불행은 우리를 모른 척 비켜가지 않습니다. 때때로 더 잘 살려 노력할수록, 삶의 불행은 더 치성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진리의 밝은 눈을 얻지 못한 우리는 지금 내 삶에 일어나는 고통에 원인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읽어드린 금강경의 제16 능정업장분은 그렇게 끊임없는 삶의 불행에 절망스러운 우리들의 절망적인 마음에 주는 부처님의 위로가 아닐까 합니다.

과거의 업과 장애를 능히 청정하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의 금강경 제16 능정업장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부처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살려는 불자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어두운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을 세상과 나누려는 불자의 노력은 잘못된 마음을 새롭게 정화하고, 다가올 삶의 불행을 가볍게 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금강경의 제16 능정업장분은 우리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불법을 믿고 실천할 때 일어나는 삶의 변화에관해 이야기 합니다. 연기의 법칙이 어렵고 어려워, 윤회와 삶과 그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들의 삶의 미세한 변화 또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런 이유로 능정업장분의 마지막에 부처님은 수보리 존자에게 자신이 설한 금강경의 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 하다 강조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불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이처럼 불법을 통해 일어나는 긍정적인 삶의 변화가 참으로 알기 어렵기에, 때때로 많은 사람이 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쉬이 그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출가한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시작된 백중은 인연의 소중함에 대한 불교적 자비의 소중한 표현이라 지난 시간에 설명을 간략히 드렸습니다. 혹 어떤 이는 오늘처럼 망자의 이름을 쓰고 그 앞에 음식을 차려 그들의 안녕을 비는 오늘의 의식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능정업장분의 말씀처럼 불법을 통한 삶의 변화는 우리 눈에 알기 어려운 것이고, 마찬가지로 오늘의 기도와 여러 의식을 통해 나타나는 긍정적인 삶의 변화는 불가사의 하여 지혜를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저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의 우리 삶속에 묵묵히 실천할 뿐입니다.  그 작은 변화를 바탕으로 언제가 우리도 부처가 될 것을 믿는 것, 그것이 불자의 길일 것입니다.

오늘의 백중 재사를 통해 먼저 내 삶이 편안하고 행복하고 고통이 없기를 기원하시고, 나아가 저 돌아가신 인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이 어느 곳에서나 편안하고 행복하고 고통이 없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시기 바랍니다.

2017년 8월 20일 – 5재

17 구경무아분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 하였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마땅히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선남자 선여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낼 지어다: ‘나는 일체중생을 멸도한다 하였으나 일체중생을 다 멸도하고 보니 실로 멸도를 한 중생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금 읽어드린 금강경 제17 구경무아분은 금강경의 안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제16 능정업정분에서 금강경은 내용의 일단락을 짓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제17 구경무아분에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불자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며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거듭 설명을 이어갑니다. 불자는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살되 남을 위해 산다는 생각을 내지 말고, 그저 끊임없이 내 안의 일어나는 집착을 없애라는 하시는 말씀, 이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 억겁의 시간 속에서 윤회하듯, 금강경도 그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갑니다. 삶의 끊임없는 반복을 윤회라 하지만, 그것은 항상 똑같은 반복이 아니고 닮은 듯 다른 변주입니다. 지금 이생의 삶은 과거의 삶의 연장이지만, 그것은 어제와 다르며,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일 것입니다. 결국 윤회는 또 다른 가능성의 반복입니다. 수레는 굴러 늘 제자리인 듯하지만, 바퀴가 지나가는 땅이 항상 새로운 자리인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수레를 끄는 사람의 마음이 수레가 향해 가는 곳을 결정하듯이, 윤회 속에서 어디 어느 곳으로 향해갈지는 우리 마음자리에 달린 일입니다. 해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윤회 속에서 늘 새로운 가능성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오늘 읽어드린 제17 구경무안분에서 부처님은 당신이 아직 깨닫지 못했던 과거생의 어느 때, 연등부처님을 만나서 미래에 부처가 될 거라는 약속을 받으신 인연을 이야기하십니다. 한 평범한 인간이 부처를 만나 그가 가진 놀라운 가능성을 인정받습니다. 누군가의 칭찬과 가능성에 인정이 용기를 북돋아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듯, 한 평범한 인간이 부처를 만나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부지런한 노력과 가르침을 실천하여 미래에 또 다른 부처가 됩니다. 금강경을 만난 불자는 그 안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안의 위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멀거나 가까운 미래 언제가 우리도 부처가 될 것을 믿습니다.

이처럼 윤회의 삶 속에 인간의 삶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맺는 인연의 관계도 그와 같습니다. 부모는 영원한 부모가 아니고, 자식은 영원히 누군가의 자식이 아닙니다. 부모는 과거의 어느 시간에 나의 자식이었을지 모르고, 자식이 혹은 그 부모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백중을 맞아 저 영단에 올리신 여러분의 인연들, 부모, 형제, 친척 등은 내 생에 또 관계의 모습으로 만날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따로 있지 않듯이, 나도 내가 맺는 관계도 영원히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로 남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금강경의 처음 시작과 제 17 구경무아분에서 부처님께 수보리 존자가 불자는 어떻게 마음을 머물고 항복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결국 우리가 변해가는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집착, 성냄, 무지를 바탕으로 인한 고통의 삶이냐, 금강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삶의 바른 모습을 이해하고 삼독을 버린 청정한 삶을 사느냐는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오늘의 백중이 인연의 소중함을 위한 자비의 표현이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유가 인연을 위한 자비의 실천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하여 세상의 모든 부처가 그러는 것처럼, 재사를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우리는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백중과 지금의 재사가 우리 삶 속에 소중한 결실을 보는 모습일 것입니다.

2017년 8월 27일 – 6재

18 일체동관분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육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법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불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저 갠지스 강에 있는 저 모래를 부처가 말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하나의 갠지스 강에 있는 모든 모래, 그 만큼의 갠지스 강들이 있고, 이 갠지스 강들에 가득 찬 모래 수 만큼의 부처님세계가 있다면, 이는 많다고 하겠느냐? 많지 않다고 하겠느냐?” “너무도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 많은 부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설한 갖가지 마음이 모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로소 마음이라 이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금강경 제18 일체동관분에서 부처님은 갠지강의 모래 수 만큼 한량없는 부처님의 세계가 있고, 각각의 세계에 수많은 중생이 살고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인간이 부처가 되는 참으로 힘든 일일진대 어찌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부처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금강경은 다시 세상에는 이토록 무수히 많은 중생이 존재하지만,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존재, 여래는 그 모든 중생을 다 안다 전합니다. 그리고 부처가 그렇게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갖가지 마음이 모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마음이 마음이 아니어서 모든 마음을 안다는 부처님의 설명은 설명이기보다 또 다른 질문의 시작입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으나,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는 부처님 말씀의 참뜻을 온전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저 인간의 마음이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는 것으로 그 뜻을 짐작할 따름입니다. 경전에서 마음은 무언가를 아는 것이라 정의되며, 그것은 순간순간 살다 사라지며, 인연과 경계를 만나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갈 뿐이라 설명합니다. 아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나’는 ‘너’를 알고, 나를 둘러싼 관계를 알고, 더 나아가 세상을 알아갑니다. 수없이 많은 중생의 아는 마음이 있어, 세상은 그 아는 마음들이 그물처럼 엮이어 변해가는 거대한 의식의 흐름입니다.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함은 끊임없는 마음의 변화를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차별이 없어 부처도 알고 중생도 알지만, 중생은 모르는 것이 많고 부처는 중생의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안다고 경전은 설명합니다.

강물이 자신이 흐르는 곳에서 때로는 빠르게 느리게 혹은 고요하게 흐르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각각 그 모양이 다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꼴이 달라 지금의 내 얼굴이 남과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릅니다. 마음의 모양이 저마다 제각각인 이유는, 그 똑같이 아는 마음 안에 제각각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인연과 경계를 만나 다르게 그 마음을 쓰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하고 영원한 실체 없이 마음은 흐르고, 그 마음 씀이 달라 갠지즈강의 모래 수 만큼 많은 중생은 다른 모습으로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마음 하나하나에 비밀처럼 특별한 무엇이 숨어 존재한다면, 부처가 그 많은 중생의 마음을 아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부처가 중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이유는 실체없는 마음이 흘러가는 원리, 즉 무아, 무상, 연기함의 법칙을 철저히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금강경 제18 일체동관분에서 부처님은 갖가지 마음이 모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안다라고 설명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처나 중생은 똑같이 아는 마음을 가졌고, 부처가 중생을 마음을 안다함은 부처는 중생이 겪는 삶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부처의 한량없는 자비는 중생의 마음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마음이 마음이 아니어 서 마음이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의 백중을 있게 한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 또한 마음이 마음이 아니어서 마음을 아는 그와 같은 원리일 것입니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를 한 목련존자는 깨달음을 얻고 선정의 깊은 삼매 속에서 자신의 어머님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알게 됩니다. 자비는 고통의 이해를 통해 가능한 것이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는 벽이 없기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아가 돕고자 노력합니다. 왜 하필 번뇌 없는 삼매속에 목련존자는 고통받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은 마음이 가진 본연의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마음은 순간순간 앎의 대상을 그 가지며, 마음이 항상 대상을 가진다 함은 마음을 무엇을 행해가는 것으로 즉 그리움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 속 본연의 그리움은 우리 주변 타인들의 고통을 보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더 나이가 그 고통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고자 한다는 것이 불교의 자비입니다. 백중은 이처럼 불교적 자비의 표현이자, 사람이 사람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까마귀가 여름의 끝자락 다리를 놓아 헤어진 연인을 만나게 한다는 칠월칠석도 인간이 가진 간절한 그리움의 표현일것입니다.  오늘 짧게 의식을 기도를 올린 칠월칠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또한 간절한 그리움은 나를 넘어 세상을 감동하게 하며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임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절함은 지극한 정성이며 정성은 오롯이 마음을 모으는 것일 테지요. 오늘 모실 백중의 재사가 떠나가신 그리고 살아있는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표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 9월 3일 – 막재

19 법계통화분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는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많다 하겠느냐? 많지 않다 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은 정말 많습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라고 하는 실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결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

방금 읽어드린 금강경 제19 법계통화분에서 부처님께서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물질로 타인에게 보시하는 사람을 예를 들며,  이처럼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복이 많겠냐고 제자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그런 사람은 복을 많이 받는다  대답을 하고,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복이 많은 이유는 실제로는 복덕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실제로는 복덕이 없어 복덕이 많다 하시는 부처님의 설명은 지금까지 금강경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질문이 끝이 나고, 또 다른 질문을 이어갑니다.

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한 우리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원리를 진제라 표현합니다. 진제가 감추어진 삶의 진실임에 반해, 보통 사람의 눈 혹은 지성으로 확인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삶의 원리를 속제라 표현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삶의 원리인 진제와 상식적 진실인 속제라는 두 언어로 불교는 삶과 세상의 변화를 설명합니다.

금강경 제19 법계통화분이 설명하는 사람이 선을 실천하고 복을 받는 일은 인과응보의 삶의 모습이며, 우리의 눈으로 확인 가능한 상식적 원리인 속제일 것입니다. 반면에 복은 실제 복이 아니어 복이다라는 역설의 가르침은 상식적 앎 저 너머의 있는 진제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오직 깨달은 자만이 아는 무상 무아 연기의 삶의 모습일 테지요. 이처럼 금강경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쓰는 말의 부정을 통해서 깨달음 자의 눈으로만 확인이 가능한 삶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진제, 즉 연기 무상 무아에서 삶을 바라볼 때, 선을 행하는 “나”가 없고, 도움을 받는 “너”도 없고, 주는 혹은 받는 물질의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로 우리는 금강경의 의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 제 19 법계통화분의 가르침을 오늘 백중의 기도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이 여름에 한 49일의 기도와 보시는 분명 복과 공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복과 공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실제 공덕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기와 무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마지막 제사에는 제사를 올리는 사람도 없고, 제사를 받는 사람도 없으며, 주고받는 공양물이 없는 진제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게 분별이 사라진 자리에기도의 간절함과, 인연에 대한 순수한 그리움, 그리고 따뜻한 자비만 남을 것입니다.

진제와 속제의 가르침으로 하나의 의문이 풀렸지만, 하필 산천이 푸르고 생명이 한창 자라나는 축제와 같은 여름에 죽음과 죽은 자를 추모하는 백중의 기도가 있는지는 우리에게 여전한 의문입니다. 7월의 여름 한가운데서 시작했던 49일 동안의 기도와 재사는 오늘 막재를 끝으로 그 회향을 갖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인연이 가고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듯, 앞으로 우리의 기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백중기도 기간 항상 수고해 주신, 신주봉 보살님, 상락행 보살님, 전거사님 그 외의 후원에서 함께 봉사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혹 그 동안 소흘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저의 부족함 때문일테니 너그러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회향을 통해 모두 평안하시고 모두 행복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최신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