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千手經 _ 내 마음이 경전이 되어

지난 번 소개해 드린 반야심경과 함께, 천수경은 한국의 사찰의식에서 가장 많이 읽는 경전입니다. 산등성에 가린 늦은 해로 산사의 공기가 아직도 차가운 오전 10시가 되면 스님들은 목탁을 집어 들고 천수경을 시작으로 일제히 사시 예불을 시작하고, 법당의 한 쪽에 조용히 자리 잡은 불자들은 번뇌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스님의 염불에 더합니다. 그리고 자식, 남편 또는 다른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지요.

“정구업 진언 수리수리 마하 수리 수리 사바하…”

천수경은 이처럼 뜻을 가늠하기 힘든 진언(다라니/주문)으로 시작을 합니다. 진언은 보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정수를 담은 신비한 주문이라 설명을 하지요. 천수경에는 다양한 진언들이 나오며, 이것은 뜻풀이가 가능한 구절과 함께 어울려 하나의 경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어 아무 뜻이 없어 보이는 말의 연속이지만, 진언은 소리 내 말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떤 묘한 울림을 전해옵니다. 20여 년 전 서울의 허름한 포교당, 집전하시는 스님의 목탁에 맞추어 처음으로 정구 업 진언을 소리 내 읽을 때, 당시의 설레면서 두려운 느낌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네요.

멀리서 잘 보이지 않지만, 높은 산의 능선 사이사이 깊은 그늘에서 산 전체를 떠받치는 계곡. 천수경 속의 많은 진언과 다라니는 어찌보면 산을 오르다 만나는 심원한 계곡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숲을 이룬 산이 하늘 가까이 솟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높이에 따르는 깊은 계곡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산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과 산의 능선을 올라가는 사람에게 계곡은 잘 보이지만, 계곡이 있어 물은 골짜기를 따라 흐르고 산을 적십니다.

이처럼 천수경의 굽이에는 이해가 가능한 말들 사이사이에 뜻을 알 수 없는 진언들이 산의 계곡처럼 천수경 전체를 받치고 있습니다. 뜻풀이가 가능한 천수경의 구절들이 보이는 산의 능선과 나무라면, 뜻을 알 수 없는 진언은 능선과 무성한 나무 사이에 가려진 계곡, 물이 흐르는 계곡이 아닐까 합니다. 천수경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습을 함께 엮어 보여줍니다. 천수경의 이러한 구조는 진리의 양면성, 말하자면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상의 모습과 설명을 할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을 함께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죠. 보이는 진리와 보이지 않는 진리가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우리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만들죠. 복잡한 세상과 우리의 삶은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상이 혹은 진리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일테죠.

그리하여 천수경은 말의 업을 참회하는 진언을 시작으로 세상과의 화해를 청하는 진언(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이 이어지고, 다시 진언(개법장 진언)으로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진리의 문을 두드립니다. 다음으로 관세음보살을 향한 예경, 귀의와 발원, 다시 참회, 귀의가 연속으로 이어지고, 함께 소리를 모은 스님과 불자들의 독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대비신주)라는 경의 깊은 골짜기에 다다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경이라 부르는 독송 천수경은 사실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의 경판 가운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죠. “독송 천수경”은 오로지 지금 “한국불교”에만 있는 우리의 경전입니다. 관음 신앙을 표방하는 여러 대승 경전에 여러 다른 형태의 대비신주가 들어있고,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 한국, 일본의 많은 사찰과 승원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대비신주) 부분만을 따로 독송하고 있었다 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렇게 대비신주만을 따로 분리하여 독송하던 신행의 형태가 서서히 발전하여 여러 구절과 진언들이 더해지는 편집이 시작되고, 조선 시대부터 지금의 독송용 천수경 비슷한 모습으로 발전이 시작되고, 일본강점기 사찰의 의식이 전체적으로 통일이 되면서 지금 우리가 독송하는 형태의 모습으로 정착이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은 불교의 많은 의식 속에서 우리의 신행을 실천하는 중요한 도구로 쓰이고 있지요.

대비신주라는 큰 계곡을 지나 다시 발원(사방찬/도량찬)과 참회(참회게/참회업장십이존불/십악참회)가 따라옵니다. 다시 일련의 진언(정법계/호신/ 육자대명왕/ 준제진언)이 이어지고, 우리의 간절한 독송이 진언이 가진 신비한 힘에 감응하여 나와 세상이 함께 깨끗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발원, 서원, 그리고 삼보에 귀의로 천수경을 끝이 납니다.

앞에서 간단히 설명해 드렸듯이, 천수경은 대장경이라 불리는 경전의 모음에 그와 똑같은 모습의 경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국 불교가 한반도의 문화와 역사 가운데 일반 대중의 신앙과 수행, 염원을 담아 만든 일종의 의식서이지요. 그래서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여러 경전과는 다르게 천수경은 여시아문, “내가 이와같이 들었다”라는 정형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안에 부처님 혹은 당신의 제자들이 등장하여 누군가에게 전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반야심경과 여타의 다른 경전들이 오온, 사성제, 연기, 무아 등등의 어려운 교리를 설명하지만 천수경에는 그런 교리적 설명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대신 천수경은 관음신앙을 상징하는 대비신주를 중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불자의 간절한 참회, 발원, 귀의, 예경 등등을 여러 길고 짧은 진언들과 함께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놓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절 집에서는 교리가 담기지 않은 경전을 어떻게 경전이라 부를까요? 나아가 어떤 중요한 가치로 천수경은 다른 불교의 경전보다 더 자주 지금 독송이 되는 것일까요?

7년의 혹독한 수행 끝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2500년 전의 부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삶과 우주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철저히 보십니다. 스스로 이룬 깨달음을 사람들에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음을 아신 부처님은 세상에 나가 가르침을 설하기를 주저하십니다. 하지만 결국 가지가지 가르침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삼독의 번뇌를 끊고 부처가 되는 길을 보이시지요.  부처님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지치지 않고 당신이 보신 진리를 당신의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에 눈앞에 펼쳐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같이 숨을 나누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테지요. 그렇게 지치지 않고 부처는 자비로 법을 토해내었고, 그의 열반후 함께 모인 여러 제자들은 그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함께 살려내어 암송하고, 가르침의 기억들을 경전으로 만듭니다.

방편이란 표현일 말해주듯이, 경전 속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신이 만난 사람의 근기에 따라 그 가르침의 쉽고 어려움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방편을 쓴다 한들, 깨달음 사람이 보는 세상과 그것을 설명하는 말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이치일테지요. 부처가 방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얘기를 한다 해도 중생의 눈높이를 완벽히 맞추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 테지요. 그래서 어쩌면 아무리 낮추어도 맞추어지지 않는 눈높이의 차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기 어렵다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모든 경전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깨달은 사람의 아래로 향하는 시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경이라 부르지만 천수경은 불교적 존재론과 복잡한 수행이론의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말하면 그것은 깨달은 사람의 고준한 시선을 담고 있지 않죠. 대승경전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공사상도 없고, 불교의 핵심이라는 중도라는 말도 연기라는 말도 들어있지 않으며, 사성제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복잡한 불교의 교리를 대신에 참회, 서원, 발원, 예경, 귀의등이 대비신주의 앞뒤를 채우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부처가 중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라지고,  참회, 예경, 발원, 서원을 통하여 중생의 시선을 그 안으로 초대합니다. 말하자면 천수경은 그것을 독경하는 이들의 간절한 염원과, 참회, 예경, 발원, 서원 등등이 독경을 통하여 그것의 내용이 됩니다. 그리하여 뜻풀이가 가능한 참회, 예경, 발원, 서원을 통하여 독경하는 자신들의 삶을 좀 더 능동적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부처가 되고자, 혹은 마음의 청정을 위하여 좀 더 노력하자는 염원을 가질 테지요. 이처럼 어려운 교리가 사라진 대신, 천수경은 경은 이성과 논리의 복잡함을 잠시 내려놓고, 소리 내 경을 읽는 이의 마음을 그 안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어려운 교리가 사라지고, 그렇게 낮은 문턱을 통해 불자는 좀 더 부처의 삶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천수경은 문턱을 낯추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비의 손길로 우리의 삶을 잡아 끌어 올려 부처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천수경”이란 제목이 말해주듯 천수경 전체가 관세음보살의 원력과 자비에 의지하여 부처의 길을 가자는 관음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천수경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비신주(신묘장구대다라니)는 관세음보살과 삼보에 귀의하여, 악업을 금하고 탐진치 삼독을 끊고 깨달음에 다다르게 해달라는 기원의 표현이며, 천수경은 반복하여 불자들의 관세음보살을 향한 귀의를 독려합니다. 정구업진언의 참회의식으로 시작한 경전은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끊임없이 찬탄하며, 불자의 마음을 관세음보살을 향한 예경으로 인도합니다.

이렇게 천수경 속에서는 참회, 예경, 발원, 서원은 날줄이 되고 진언들은 씨줄이 되어 독경하는 이의 마음을 엮어갑니다. 그렇게 엮여 변하는 우리의 마음이 결국 천수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되겠지요. 천수경의 진언들은 저 계곡의 물처럼 이해 가능한 말의 의미를 우리의 마음에 자라게 하는 양분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한국불교 사찰의 의식에 가장 중요한 두 경전, 천수경과 반야심경은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을 매개로 불자의 신행 생활을 돕고 있지요. 반야심경이 공사상을 바탕으로 한 깊은 교리적 설명으로 불자의 의식을 고양한다면, 이에 반해 천수경은 한없이 눈높이를 낮춘 불보살의 자비에 의해 불자의 염원을 받아안고 있습니다. 천수경이 교리를 담지 않고도 경이라 불리는 이유와 한국 불교가 이러한 천수경을 만들어낸 이유는 아마도 논리와 이성으로 표현되는 부처님의 교리가 가지는 우리 삶 속에서의 한계와,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자비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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